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 멸망/사례 (문단 편집) ==== [[송나라|송]]★◆ ==== || [[파일:songdynsty.png|width=400]][br][[파일:금과 남송 지도.png|width=400]] || || 송의 영토와 영향권 || |||| '''원인''' || || 전쟁 ||'''대문 활짝 열고 시작한 전략적 불리함([[연운 16주]])'''[br]패전해 정복을 겪음[br]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송이종]])[br]'''외세가 무력으로 제압([[금태종]], [[쿠빌라이 칸]])'''[br]'''한계를 초과한 물량 ([[양양 공방전]], 정가주 전투, [[애산 전투]])'''[br] '''대신들과 황제들의 병크'''[br]'''[[정강의 변]]'''[br][[개희북벌]][br]'''[[단평의 입락]]'''|| || 내란 ||말기 민중들의 반란|| || 내정 ||극단주의 세력의 만연[br]'''막장인 지도자([[한탁주]], [[정대전]], [[가사도]])'''[br]'''상상을 초월할 수준의 무능한 행정 및 외교([[송휘종]], [[송흠종]], [[송이종]])'''[br]'''실패로 돌아간 개혁([[왕안석]])'''[br]군벌에 대한 의도적인 배척 및 전장의 충신을 의심함([[송고종]]) [br]일부 정치,경제적 특권층의 무리한 권력/재력 개혁 ([[가사도]]) [br]재상들의 권력 찬탈([[진회]], [[한탁주]], [[사미원]], 정청지, [[정대전]], [[가사도]])|| || 공황 ||'''국가 최고 요충지 [[샹양시|양양성]] 함락'''[br]'''수도 [[개봉]], [[임안]] 함락'''[br]마지막 수도 애산 함락[br]'''국가 경제의 파탄'''[br]바닥을 드러낸 국고[br]비정상적인 세율[br]'''지배층의 지나친 향락심취([[송휘종]])'''|| || 재해 ||'''몽골 제국의 침략'''[br]|| |||| '''결과''' || || 멸망 ||국치(합병) || 먼저 송나라는 문치주의로 인해 군사력이 약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은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북송 건국으로부터 24년 전에 [[한간]] [[석경당]]이 하북성과 산서성의 북부인 [[연운 16주]]를 요나라의 [[야율덕광]]에게 쌩으로 던져주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산해관]]과 [[거용관]]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만리장성]] 라인은 중국사에서 [[홍타이지|우회하거나]], [[오삼계|안에서 문을 열어주거나 하지 않은 이상 절대 뚫린 적이 없었던]] [[테오도시우스 성벽]] 저리가라할 수준의 철옹성이었으나, 석경당이 그걸 '''요나라에 공짜로 퍼줬다.''' 이건 장기하는데 차포를 떼는 정도가 아니라 차포를 덤으로 주는 수준의 불리함이었다. 송나라가 이것만 지켰어도 북송이 정강의 변으로 허무하게 털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명청교체기|명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몽골군을 상대로도 훨씬 잘 버텼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송나라는 이전의 당나라에 비해서 군사력이 약했지만, 그걸 충분히 덮을 정도로 경제력이 압도적이라서 서하나 요나라, 대리국 같은 이민족 왕조를 구워삶는 것도 능숙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두 번의 갈림길에서, 치명적인 외교 실수 두 번을 저질렀고[* 첫 번째 금나라 때는 [[방랍의 난]]이라는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는 불운도 있었다.], 그로 인해 두 번 다 멸망하고 만다. 남송은 [[단평의 입락|개봉과 낙양을 비롯한 북송의 영토를 수복하고자 20만 대군을 통해 화북을 공격했고]] 이는 몽골의 분노를 부른다. 이에 몽골의 [[오고타이 칸]]은 남송의 침입을 격퇴한 후 1235년 2월의 쿠릴타이에서 남송 공격에 대한 방침을 결정했고, 몽골군은 남송을 공격하기로 한다. 1235년 10월에 몽골군에 의해 성도가 떨어지고, 다음 해 3월 양양이 함락되었으며 1237년이 되자 몽골군은 동쪽으로 황주에 도달하였다. 사태가 급반전된 것은 남송의 명장 맹공 덕이었는데 맹공은 강릉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몽골군을 연전연파하면서 양양 일대를 다시 수복하고, 기주를 되찾았으며, 사천으로 가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영토를 수복하는 등 저력을 보여준다. 1241년에 몽골의 대칸 오고타이가 죽자 몽골군은 후퇴했고 몽골 제국이 내부의 다툼으로 시간을 준 동안, 남송은 그 막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어마어마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258년에 새로 즉위한 몽골의 대칸 [[몽케 칸]]은 다시 군대를 나누어 남송으로 대대적인 침공에 들어갔다. 몽케는 이미 1253년에 동생 쿠빌라이를 시켜 운남의 대리국을 점령하여 남송을 포위 공격할 기반을 다졌는데 이 공격으로 남송을 멸망시킬 작정을 했다. 몽케 본인이 이끄는 주력은 사천, 동생 쿠빌라이는 악주(오늘날의 호북성 무한시), 다른 별동대는 운남에서 담주(오늘날의 호남성 장사시)로 치고 들어갔다. 몽케는 사천의 성도를 공략하고 곧이어 사천 합주 조어성(오늘날의 사천성 중경시)를 공격했는데 사천의 다른 지역이 겁을 먹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던 것과 달리 남송의 명장이자 맹공의 부장이었던 왕견은 주민 10만과 결사 항전을 주장하여 저항했고 몽케는 5개월 동안 공성전을 펼치다가 철통 같은 방어를 뚫지 못하고 전사했다.[* 참고로 회수가 없는 이유는 몽골은 거기 뚫기 힘드니까 일단 무시하고 형주부터 친거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 영웅이 되었던 [[가사도]]가 1260년 이후 덜컥 재상이 된다. 도량형, 통화개혁, 부정부패 엄단, 긴축 재정 정책 등 평시 수상으로는 나쁜 인물은 아니었지만 군벌들을 중앙에서 밀어내어 군사력을 악화시켰다. 그리고 양양 공성전은 무려 1267년부터 1273년까지 6년동안 이어졌다. 보통이라면 그만하고 물러갈 법도 한데, 몽골 제국 측에서도 가지고 있는 전력을 때려붓는 느낌으로 끝까지 전투를 지속했던 것이다. 1268년, 무려 10만 명의 몽골 병력이 양양성을 포위했다. 그와 동시에, 쿠빌라이는 500척이 넘는 함선을 새로 건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양양 주변의 하천, 수로를 장악했다. 결국 번성이 무너지고, 여문덕과 여문환[* [[김용(1924)|김용]]의 소설 [[신조협려]]는 이런 진짜 명장을 푸대접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탐관오리로 만들었다.....]은 1274년 병사들이 아사 직전이 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그 가사도마저 15만 대군으로 막아섰으나, 패배. 결국 송나라는 수도인 임안마저 함락된다. 이후 마지막 재상 [[문천상]]이 최후의 4년을 분투했다. 이때 망명 정부파의 양진이라는 인물이 "내가 저들의 진영에 가서 시간을 벌겠다." 며 대놓고 가서 사로잡히면서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에 나머지 인물들은 도망치는데 성공했고. 결국 푸저우까지 함락당하자, 이들은 홍콩 근처까지 도주해서 계속 정부를 이어나갔고 이 와중에 문천상은 몽골군에게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홍콩 근처의 애산에서 소략한 임시 정부를 꾸린 최후의 잔존 세력은, 군-민을 합쳐 모두 20만명 가까이 되었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정부' 의 기틀은 거의 다 [[육수부]]가 전담해서 책임졌는데, 육수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꼿꼿하게 행동하다가도, 조정이나 군대에 혼자 있게 되면 늘 비통한 생각에 눈물을 흘렸으며,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결국 1279년, 쿠빌라이의 원나라에 의해 패배 남송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멸망한다. '''[[애산 전투|황족들과 신하들의 최후의 항전]]'''은 영화 시나리오에서 나올 법한 간지의 정석이자, 비극의 종착점이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장세걸은 폭풍이 몰아치자 하늘에 대송이 망할게 할것이면 이 배를 몽땅 다 가라앉혀 다 죽게 해달라고 했는데 그의 말대로 결국 패잔 함대마저 폭풍에 몽땅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 한명의 생존자가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으니 그는 바로 [[명태조]]의 외할아버지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애산 전투]] 참고. 원나라 측 기록에 의하면 다음 날 바다 위에 떠오른 시체만 10만 구였다고 한다. 이로서 남송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고, 남중국해로 도피한 장세걸 함대가 폭풍에 침몰, 대도로 압송된 문천상이 처형되면서 남송 부흥 운동은 종말을 맞이하였다. [[원나라|세계 최강의 국가]]의, [[바린 바얀|가장 강력한 군단]]을 상대로, 가장 오랫동안 맞서 싸운 끝에 [[홍콩|세상의 끝]]에서 [[송소제|황제]]도, [[문천상|승상]]도, [[장세걸|대장군]]도, [[육수부|사대부]]도, 황족도, 백성도...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전부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진정이라는 사학가는 이런 평을 내렸다. >13세기 몽고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 당시, 그들은 오직 남송에서만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송을 공격했을 때 부터, 1279년 광동 애산에서 남송 최후의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내릴 때 까지, [[남송]]은 장장 40여년간 전쟁을 벌여 [[몽케 칸]] 또한 합주 조어성에서 전사하였다. 장원급제 출신 재상 [[문천상]]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은, 조송(趙宋)의 제실(帝室)이 300년간 사대부를 우대한 것에 대한 최선의 보답이었으며, 송대 문관정치가 거둔 유종의 미 그 자체였다.[* 남송 이전 있던 왕조인 후주의 시씨 일족 역시 남송과 그 운명을 같이 했다.] >-진정(金諍), 중국 과거 문화사 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